원철스님의 염색이야기】청색과 적색이 만나는 보라색은 ‘화합’의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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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끝나고 여름의 문턱에 발을 들여 놓은 달 입하(立夏)는 사월 십이지 중에서 뱀을 상징한다. 뱀은 동면을 하는데 10월 중순에 겨울잠을 자기 시작해서 사월이면 밖으로 나와 먹이활동을 시작한다. 우리 문화 속에서 뱀이 상징하는 바는 다양한 곳에 다양한 문화로 전해진다. 뱀의 상징성이 의미하는 바가 크기에 농경문화권에서는 풍요를 상징하는 지신(地神)으로 간주되어 왔다. 뱀은 수족이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런 해가 없지만 잘못 건드리면 민첩한 움직임과 발가락이 없는 대신 혀가 양분되어 음(陰)에 속하며 독을 품고 있어 화를 당할 수도 있다.
뱀은 뒤돌아보는 법이 없이 그저 앞만 보고 전진할 뿐이라고 한다. 들이나 산에서 뱀을 만나면 앞으로 뛰지 말고 뒤로 후진하라고 한다. 뱀은 동남쪽을 상징하며 계절로는 여름의 시작점이다. 옛날 어른들께서 한 번쯤은 ‘너 띠가 뭐니’ 하고 물어보실 때가 있다. 우리들 중 12분의 1은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뱀띠로 태어난다. 손으로 짚어가며 충이네 합이네 하며 좋다 안좋다 하시며 조선후기부터 민간에 크게 유행한 당사주 책에 나오는 뱀띠에 관해 말하는 것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당사주 책에 나오는 설명을 보면 뱀띠는 “용모가 반듯하고 학문과 예능에 문무를 겸비했다”고 하는 내용이 나온다. 또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성을 뱀띠일 경우 사해(巳亥) 충(沖)이라 안좋다는 표현도 듣게 된다. 아마도 뱀띠가 돼지를 만나면 충이다 하는데 상징하는 바를 생각해보면 뱀은 계절로는 여름 초입이요 방향은 동남쪽이요 색으로는 적색이다. 돼지는 계절로는 겨울 초입이고 방향은 서북쪽이요 색으로는 회색이다. 여름 뱀과 겨울 돼지가 왠지 너무 거리감이 있어 보이지 않는가? 여름인 사월 사시(巳月 巳時)는 한창 활동을 해야 하는 따뜻하고 밝은 대낮인데 반해서 해월 해시(亥月 亥時)는 춥고 캄캄한 밤이니 따듯하고 밝은 여름과 춥고 어두운 겨울이 달라도 한참 다르니 상징성으로 볼 때 극과 극이다. 가까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뱀은 따뜻한 한낮이요 돼지는 추운 한밤중이니 서로가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은가. 색으로는 청적간색과 백흑간색으로 아무튼 계절과 십이지가 비유하는 상징성과 색으로 비교 하는 것도 재미있는 상상이다. 사(巳)월의 방향은 동남쪽이며 활발히 활동하는 시간은 오전의 햇살 좋은 시간이다. 9시에서 11시 사이를 사시(巳時)라고 하는데 예경의식인 사시 불공(巳時佛供), 사시예불(巳時禮佛), 사시마지(巳時摩旨)를 올리는 시간이다. 경전 〈숫타니파타〉에서 뱀은 수행자가 고행을 통해 새로운 경지에 도달하는 과정으로 뱀의 허물을 벗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보라색 옷 메시지 전달 효과
초목 태운 재로 홍색소 추출
콩대 태워 만든 재가 ‘으뜸’
청춘의 쪽염색을 물들인 후
분홍색을 얹어 주면 보라색
방향과 시간이 있다면 이제 색으로 들어가 보자. 사월(巳月)의 색은 방향이 동남쪽이니 동쪽의 청색 기운과 남쪽의 적색 기운이 함께 어우러진 청색과 적색의 간색이다. 목생화의 적색이니 적색은 적고 청색은 많은 청보라색 정도로 보면 되겠다. 전통염색은 보는 관찰자에 따라 달리 보이기에 정확하게 지정할 수 없지만 『규합총서』에서 말하는 청적간색(靑赤間色)은 목생화(木生化)하여 상생(相生)의 색(色)으로서 청색과 적색의 복합 염색으로 보라색으로 보면 되겠다. 어린아이가 자라서 청년이 되어가는 시기 즉, 옅은 붉은색 사랑이 피어나는 핑크빛 그 시절이 되었다. 청색 청춘의 봄을 지나서 핑크빛 여름, 사랑의 문턱에 다다르면 가슴 설레고 심장이 두근거리며 할 말도 많아지게 된다. 청춘의 색 청색과 핑크빛 사랑의 시작이 만나 만들어 내는 색이 보라색이다.
보라는 화합의 색이다. 보라색은 상징적인 메세지로 화합을 의미하기에 보라색 의상은 메세지 전달 의미로 착용하기도 한다. 미국 대통령 조바이든 취임식에 카릴라 해리스 부통령은 화합의 의미로 보라색 코트를 입고 참석했다. 보라색은 혼자만이 낼 수 있는 색이 아니다. 청색과 적색이 함께 했을 때 나오는 색이다. 그래서 정보라를 내기 위해서는 청색을 내는 쪽염색을 한 후에 홍화의 붉은 염색을 해주면 가장 아름다운 보라가 나온다. 『규합총서』에 보라색 물들이는 방법으로 여자의 옷에는 진한 옥색을 들이고 홍화연지를 물들이라 하였다. 여기에서 연지는 홍화의 홍색소를 추출하여 붉은색만 가둬둔 상태의 염료를 말한다. 이때 홍화의 홍색을 염색하고 청색을 하면 색은 이지러지고 깨져 버린다. 반드시 봄의 계절색 청색을 먼저 염색하고 여름으로 넘어가는 밝은 홍화의 홍색으로 염색을 하여야 한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다.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 안되듯이 여름이 먼저 오고 봄이 오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봄의 청춘이 끝나고 여름의 문턱에서 만나는 색, 사랑의 색, 화합의 색, 보라색을 만들어 보자. 보라색 염색은 청색 쪽물을 진하게 염색한다. 홍화의 핑크빛 적색을 추출해야 한다. 홍화염색이 까다롭긴 하다. 사랑도 처음부터 쉽게 이루어지지 않듯이 홍색소를 추출하는 것이 번거롭긴 하여도 일단 염색을 했을 때 분홍색부터 적색까지 홍화염색이 주는 맑은 색은 까다롭고 힘든 시간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홍색소를 추출하기 위해서는 초목을 태운 재를 이용한다. 초목의 재(灰)로는 『규합총서』에서 말하기를 콩대를 태워 만드는 재(灰)가 가장 좋다고 한다. 요즘은 재를 태우는 것도 구하는 것도 쉽지 않기에 화학적으로 잘 정제된 탄산칼륨을 이용하여 홍화의 홍색소를 추출해서 염색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절집에서의 산중 생활은 염색을 하기에는 모든 조건이 좋다. 콩대를 미리 수집해 두었다 태워서 잿물을 내려 염색을 한다. 이것이 바로 전통염색의 맛이 아닌가. 청춘의 쪽염색을 흠뻑 물들인 후 사랑의 분홍색을 얹어 주면 화합의 색 보라색을 만날 수 있다. 이것이 상생의 색, 화합의 색, 사랑이 시작되어가는 색 보라색이다.
봄인가 했더니 어느새 여름의 문턱이다. 봄기운은 가득하고 여름의 기운이 서서히 들어오기 시작한다. 밝고 따뜻한 기운으로 신록의 계절이다.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까지 푸르른 계절 ‘만화방창(萬化方暢) 아니노지는 못하리라’ 노래 한 소절 흥얼거려보자. 어린이날 노래 ‘날아라 새들아 푸른 하늘을…’도 좋다. 어서 빨리 마스크 벗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 본다.
(사) 한국전통문화천연염색협회 이사장
세종충남종무원장
광천 관음사주지
출처 : 한국불교신문(http://www.kbulgyo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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