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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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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347회 작성일 20-02-03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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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불교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나요?</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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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처님의 말씀은 왜 진리인가요?

    인간은 누구나 고통 없는 삶, 즐겁고 행복한 삶을 염원합니다. 그것은 반대로 인간의 현실적인 삶이 그만큼 괴롭고 불행할 때가 더 많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합니다. 현실의 삶이 어렵고 힘들수록, 인간은 마음의 안식처로 삼을 신앙의 대상을 갈구하게 되는데 그런 점에서 모든 인간은 필연적으로 ‘종교적 동물’ 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가장 독특한 특성은 인간은 ‘이성(理性)을 가진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오늘날 찬란한 현대문명을 이룩하고 세계를 경영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이성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사 안에서 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이 이성의 한계너머에 있는 것, 그래서 이성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 그것을 우리는 궁극적인 문제라고 부릅니다.
    예컨대, 인간은 왜 살아야만 하는가, 인간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신은 존재하는가, 나는 왜 하필이면 이런 사람으로 태어났는가 하는 등과 같은 물음에 대해서 이성은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 물음에 대해서는 대답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이성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이러한 물음에 대답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종교뿐일 것입니다. 철학도, 예술도, 학문도 그 무엇도 이러한 물음에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면 누구나 이러한 물음을 향한 욕구를 저버릴 수 없으며 종교는 바로 이러한 궁극적 물음에 관한 해답을 제시하는 구체적인 체계인 것입니다.

    인간은 찰라적이고 제한된 삶에 만족하지 않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삶의 의미를 찾아 실현시키려는 이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는 믿음이라는 곳으로부터 출발하여 이러한 이상을 실현시켜 나갑니다. 종교는 믿음 중에서도 가장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궁극적인 무엇에 관한 믿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종교는 믿음을 통해서 삶의 의미를 찾게 해주고 불안을 극복하게 해주는 체계인 것입니다. 종교적 행복은 완전한 행복, 절대적 행복입니다. 왜냐하면 종교적 행복은 인간에게 자유를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나 구원과 같은 종교의 궁극적 성취는 인간을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게 합니다. 진정한 종교의 체험은 심지어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마저도 초월하게 하는 자유, 즉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입니다.    돈이나 권력등을 통한 일시적이며 제한적인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초월하여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것이 종교인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한 자유에서 오는 행복감은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인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이 가짐으로써 행복감을 추구하게 하는, 그래서 항시 있으면서도 갈증을 느끼게 하는 그런 불완전한 행복감이 아니라 종교적 행복감은 그 자체로써 만족한 완전한 행복인 것입니다.

    또한 종교는 ‘나’ 보다도 ‘너’ 를 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이던 진실된 종교는 모두 ‘나’나 ‘우리’보다도 ‘너’나 ‘너희’ 혹은 ‘그’나 ‘그들’을 위해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궁극적 관심에 해답을 제시하며 믿음을 가짐으로써 불안감을 이겨나갈 수 있게 합니다.

    종교는 인간이나 우주 만유가 자신의 근본으로 돌아가라는 가르침이며 각자에게 주어진 근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주 안에 있으라’ 하고 ‘주의 품에 안기라’고 하며,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으라’고 합니다. 종교 중에서도 불교는 내가 우주의 주인이 되어 나의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위대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 불교

    <불교의 삼보>

    불교에서 가장 가치 있고 귀중하게 여기는 세 가지 보배라는 뜻으로 ‘부처님(佛)’과 ‘부처님이 설하신 법(法)’, 그리고 그 가르침을 수행 실천하는 ‘스님(僧)’을 말하는 것입니다
    삼보 가운데서도 중심이 되는 것은 ‘법’, 즉 부처님께서 깨닫고 가르친 진리입니다. 불(佛)은 법(法)를 깨우친 분이며, 승(僧)는 법을 이해하고 실천함으로써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도달하고자 뜻하는 수행자를 말합니다.

    불보(佛寶)
    부처님의 원래 말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깨달은 자’를 뜻하는 ‘붓다(Buddha)’를 음역한 ‘부처’를 높여서 부르는 말입니다. 중국어로 한역(漢譯)하면 ‘불타(佛陀)’라고 하며 흔히 약칭하여 ‘불(佛)’ 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은 자는 누구나 부처이고 또 깨달음의 가능성은 누구에게나 있으므로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경전에 의하면 석가모니불 이전에도 여러 부처님이 계셨고 미래에는 미륵불이 출현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불사상(多佛思想)은 기원전 1세기경 나타난 대승불교에서 더욱 발전하여 과거불, 미래불 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다른 세계에 무수한 부처들이 있어 법을 가르치고 계신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부처님은 시간과 공간에 따라 혹은 형상에 따라 숫자에 관계없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부처, 즉 불타는 BC 6세기쯤에 인도 카필라국에서 출생하여 태자(太子)의 지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일체의 번뇌를 끊고 우주의 참진리를 알아서 깨달음을 이루어 중생을 위해 설법하고 깨우쳐 주었던 석가모니을 존경하여 일컫어 부르고 있습니다.

    법보(法寶)
    법(法)은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다르마(Dharma)’의 한역어(漢譯)로써 부처님의 가르침이며 부처님께서 깨달은 진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법이란 부처님께서 스스로 깨달은 현상세계의 실상을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한 가르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전하고 해석한 것이 불교경전인 것입니다.
    초기의 불제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법’과 ‘율’이라는 두 가지로 분류하였고 나중에 이 법은 경장으로, 율은 율장으로 발전하였으며 이것들을 주석한 논서들은 논장으로 분류되었습니다. 이 경장 율장 논장을 삼장(三藏)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삼보중의 법보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교법(敎法)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마지막 설법에서 “네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아라”라고 하셨으며 “내가 설한 법과 율이야말로 내가 멸한 후 그대들의 스승이 되리라.” 라고 한 것 등은 모두 법(法)의 절대적인 영원 불변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승보(僧寶)
    인도의 산스크리트어 상가(sagha)를 한역(漢譯)하여 ‘승가(僧伽)’또는 줄여서 ‘승(僧)’이라고 하는데 원래는 ‘일정한 목적을 위하여 사람들이 하나로 연합된 단체’를 일컫는 말이었으나 불교에서는 출가수행자(出家修行者)의 교단(敎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승가(僧伽)의 출가수행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닦고 실천하며, 널리 펼치고, 발전시키고, 번역하고, 유지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더불어 귀중한 불교의 삼보로써 존중되어지고 있습니다.
    최초의 승가는 석가모니께서 깨달음을 얻은 후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함께 수행한 적이 있는 다섯 수행자를 교화(敎化)하여 제자로 삼았는데, 이때 처음으로 승가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는 출가수행자인 비구(比丘) · 비구니(比丘尼)만 아니라, 재가신자(在家信者)인 우바새(優婆塞:近善男 재가남성신자) · 우바이(優婆夷:近善女 재가여성신자)를 포함한 4부대중(四部大衆)으로 구성되었으나, 점차 출가수행자의 단체만을 일컫는 말이 되었습니다. 

  • 부처님의 생애

    <부처님의 탄생>

    부처님은 어머니인 마하마야 왕비로부터 태어났습니다. 그 당시 인도에서는 출가한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는 친정으로 가서 낳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이 풍습에 따라 마야부인은 친정인 코올리국으로 가는 도중 룸비니라는 아름다운 꽃동산에 이르렀을 때 싯다르타 태자를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탄생하신 부처님은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한손으로 하늘을 다른 한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我當安之)”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도다. 모든 세상이 다 고통 속에 잠겨 있으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라는 뜻으로써 이것은 결코 인간 석가의 특수성을 내세우기 위한 것은 아니라 모든 생명들이 부처의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주고 스스로 그것을 실증해 보임으로서 모든 생명들에게 불성이 있다는 보편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왕은 이름난 점성가를 불러 태자의 장래를 알아보고 싶었습니다. 태자의 얼굴을 보고 난 사람마다 놀라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태자는 뛰어난 위인의 상을 갖추고 있습니다. 왕위에 오르면 무력을 쓰지 않고 온 세상을 다스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될 것이고, 출가하여 수행하면 반드시 부처님이 되어 모든 중생을 구제해 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왕과 신하들은 한결같이 기뻐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시타라는 선인(仙人)이 카필라성으로 찾아왔습니다. 그는 히말라야 깊숙한 곳에서 세상과 인연을 끊고 수도에만 전념하고 있었는데, 천신들이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태자가 카필라의 왕궁에 태어난 것을 천안(天眼)으로 보게 된 선인은 태자의 얼굴을 보려고 왕궁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아시타선인은 태자를 팔에 안고 그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습니다. 한참 동안 말없이 태자의 얼굴만을 들여다보던 선인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 왕을 비롯하여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습니다. 왕은 선인에게 물었습니다. “태자를 본 사람마다 크게 기뻐하였는데, 선인은 왜 말 한마디 없이 울기만 하시오? 어디 그 까닭을 속시원히 말해 보시오.”
    그러자 선인은 입을 열었습니다. “대왕님, 염려하실 일은 아닙니다. 태자는 장차 모든 중생을 구제할 부처님이 되실 분입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다는 것은 참으로 귀하고 드문 일입니다. 그러나 저는 너무도 늙었습니다. 태자가 도를 이루어 부처님이 되실 그때까지 살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슬퍼서 눈물이 저절로 나온 것입니다.”


    싯다르타 태자가 전륜성왕보다 훨씬 뛰어난 상을 가졌다는 아시타선인의 말을 듣고 왕과 신하들은 모두 기뻐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위를 이어받아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출가하여 부처님이 되리라는 말에는 어쩐지 섭섭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웃나라인 코살라의 침략을 늘 두려워하던 카필라에 사는 사캬족들은 이상적인 전륜성왕이 출현하여 코살라뿐 아니라 온 세상을 평화롭게 다스려 줄 것을 고대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태어난 왕자가 나라를 다스릴 인물이 아니라, 출가하여 종교적인 대성자가 되리라는 예언이었습니다. 

  • 우담바라

    인도에서 3000년에 한 번 전륜왕이 나타날 때 꽃이 핀다고 하는 상상의 식물
  • 관세음보살

    보살의 하나. 괴로울 때 그의 이름을 정성으로 외면 그 음성을 듣고 구제하여 준다고 함. 범어식 이름은 아발로키테스바라(Avalokitésvara).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대비(大悲). 대비관음. 대비보살. [준말] 관세음·관음·관음보살.
    "나무 ∼"
  • 49재란

    49재는 종교를 막론하고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장례문화로 자리했다. 재벌과 유명 연예인들의 죽음은 언제나 화젯거리인데, 이슈의 마지막은 으레 그들의 49재 기사로 채워지게 마련이다. 살아남은 자들은 49재를 통해 죽은 자에 대한 그리움 또는 원한을 털어낸다. 49재를 지내기 전까지는 망자에 대한 왈가왈부를 삼가는 게 또한 예의다. 이는 비록 그의 육신이 죽었다 해도 49일 동안 영혼은 존속한다는 믿음에서 유래한다.

    49재란 말 그대로 고인(故人)이 된 지 49일이 되는 날에 치르는 의식이다. 이때까지는 정신이 살아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게 되면 49일간 중유(中有) 혹은 중음(中陰)이라 불리는 상태로 지내게 된다. 다음 세상에서 또 다른 생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일종의 ‘대기’ 기간이다. 사찰에선 이렇게 반쯤 살아있는 영가(靈駕)들을 위해 7일(1주일)에 한번씩 7회에 걸쳐 제사를 지내준다. 초재 2재 3재 순으로 번호를 붙이는데, 중간은 생략하고 49재만 지내도 무방하다. 푸짐하게 차린 음식과 정성어린 예배로, 자식은 못 다한 효도를 뒤늦게 다하며 부모는 살아서 못 먹였다는 아쉬움을 자위한다. 스님들은 천도(遷度)의 노래를 속삭여주며 살아서의 미련과 회한을 떨어내라고 다독인다. 

  • 충남종무원은?

    충남종무원?

  • 명상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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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공부는 어떻게 해야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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